서울 토박이의 농사일기
<2006년 6월 2일>
갖가지 모종을 사러 중앙 시장에 나갔다. 물로리에 작은 폐교를 하나 임대해 놓았는데 운동장 한켠에 약 400평정도 되는 밭이 있기에 얼떨결에 농사꾼이 되려는 것이다. 농사래야 처녀시절 우리집앞 조그만 텃밭에다 친정엄마께서 가지랑 고추랑 푸성귀 몇가지 가꾸시는 걸 언뜻 본 것이 전부인데도 그 기억만을 믿고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농사도 다 때가 있는 것인데 지금 심어서 열매를 딸수 있을려나?' 걱정하시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어머님의 단골 모종가게에 들러 싱싱한 모종을 찾느라 이리저리 살폈다. 늦었다지만 아직 시장엔 모종이 한창이다. 우선 제일 중요한게 고추다.
“아주머니, 이 고추 맵지 않아요? 청량고추 아닌가요?”
짐짓 뭘 좀 아는체를 해본다. 혹시 철모르는 농삿꾼 티가 나면 어쩌나 내심 주눅이 든다.
“ 아니여. 그건 부광고추여”
모종가게 아줌마는 처음보는 아낙에게도 반말 일색이다. 시장이 아닌 장소였다면 기분이 상하기도 하련만 하나도 서운치 않고 더 정겹게 느껴지면서 나를 금방 시장 사람의 일부로 만들어 버린다.
일반고추, 청량고추, 부광고추(아주머니 말씀이 청량고추보다 덜 매운맛이란다), 꽈리고추(내가 제일루 좋아하는 고추이다. 꽈리고추의 값이 늘 만만치 않기에 이번엔 꼭 스스로 가꿔 여름내 물리도록 먹어야지. 내심 기대가 대단한 품목이다) 등 고추종류만도 네가지나 되었다.
합해서 400대를 샀다.
“너무 많지 않을까?”
어머님은 강원도내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님을 따라 이곳저곳으로 전근을 다니시며 동네 주민들에게 농사법을 조금씩 배워 오셨던 터라 나처럼 농삿일에 아주 문외한은 아니시므로 어머님의 의견은 내게 아주 중요했다. 하지만
“그래도 밭이 꽤 넓으니 다 채우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라며 다소 욕심을 내보이자
“그럼 그래봐.”
라시며 어머님은 두말 않으신다. 늘 내 의견을 존중해 주시는 시어머님이시다.
예전엔 없던 호박고구마라는 것이 새로 나왔단다. 깍아먹기용이라나?
100대만 사고 나머지는 밤고구마싹으로 사는게 좋을 것 같아 300대를 샀다. 밭이 제법 큰 규모라 내 욕심의 분량도 점점 커졌다.
주품목인 고추와 고구마는 되었으니 이젠 재미삼아 몇가지 더 사보기로 했다. 수박10개, 참외10개. 방울토마토 12개, 오이 20개. 마디호박 10개. 그리고 그만 사려는데 잠깐! 이름만 들어도 정이가는 것이 눈에 띈다. 수세미랑 조롱박.
“어머니 이것도 사요,”
“그건 뭐하려고?”
“그냥요. 재밌잖아요”
3개씩 사고서 돌아서려니 근대싹이 보여 덤으로 5개 얻었다.
구입한 모종을 차 뒷좌석에 실으니 하나가득이다. 차안이 금새 푸른 밭으로 변했다. 상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모종사기는 일단 성공!
<2006년 6월 3일>
아침 일찍 애들 학교 보내고 나서 남편과 시어머님. 시아주버님과 함께 물로분교로 떠났다. 일찍이래야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9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다.
“아침 일찍 서둘러서 선선할 때 일을 해야지 뙈약볕에 어쩔려구 늑장이니?”
어머님은 뜨거운 햇볕에 아들며느리가 고생할 생각에 한 걱정이시다.
남들은 다 일 끝내고 쉴 시간에 우리는 그제서야 시작이니 아무래도 농사꾼이 되려면 아직도 한참 걸릴 것 같다.
시골에 아주 터잡아 살면서 새벽에 일어나서 시원할 때와 저녁나절엔 일하고 더운 낮엔 쉬는 것이 일반인데 우리는 춘천시내에 살다보니 그게 되질 않으니 남보다 더 힘든 농사를 짓는거다.
강원도의 자연은 늘 그렇듯이 겹겹이 진초록 산길이다. 더구나 6월임에야.
농사야 늦든말든 싱그러운 바람결에 기분이 좋아진다.
인제쪽으로 가다가 두촌면을 지나 바로 좌회전해서 차로 15분쯤 들어가면 우리 물로분교이다.
가는 길엔 험하지만 길지는 않은 고갯길을 두개나 넘어야 한다. 첨엔 고갯길이 험하다고 느꼈지만 자주 왕래를 하다보니 한결 수월하게 느껴진다. 포장이 잘된 도로이긴 하지만 인적이 드물고 흑염소 방목장을 지나가는데 매일 오전10시쯤엔 300~350마리나 되는 흑염소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앉아 비켜주질 않는 고역(실제로 이 일은 고역이라기 보다는 재미있는 일로 우리는 그것을 즐감하곤 한다)을 치루곤 한다. 그럴때면 난 디카를 찾느라고 분주하다. 이때만큼은 도로의 주사용자는 염소들이다. 크락숀을 살짝 누르면 마지못해 급할 것도 없다는 듯 천천히 길을 비켜주곤 한다.
누가 뭐라든 그저 모른체 제 생각만 하는 놈들도 있기 마련이어서 그럴땐 하는 수 없이 좌우회전을 해야만 한다. 그런 놈들이 밉기는커녕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를 보는 것 같아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우게 하는 것이다. 그래. 저들도 이 자연의 주인인 것은 마찬가지인걸 뭐.
분교에 도착하자 밭을 갈아달라고 동네 주민에게 거금 5만원을 주었던 터라 어제까지는 딱딱했던 흙이 먼지가 풀풀 나는 고운 흙으로 변신해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며칠전까진 밭이라기 보다는 온통 풀밭에다가 작년에 심었던 옥수수뿌릿대며 딱딱한 마른땅에 불과했기에 영 농사질 맘이 내키질 않았었다.
우리에게 밭을 갈아달라 부탁받은 동네주민은 망촛대가 하늘높이 키를 자랑하고 있는 밭을 바라보면서 우릴보고 제초제를 쓰란다. 그렇지 않으면 도로 다 살아나서 곡식이 되질 않는다면서.....
한 보름정도 지나면 독성이 다 없어지니 괜찮으므로 그동네 농사꾼들은 다 그렇게 한다나?
그래도 그럴수야 없지. 명색이 ‘유기농체험장’을 한다고 교육청에 사업계획을 써내고 임대한 것인데. 더구나 우리가족이 먹을 채소며 곡식인데 힘들더라도 해보는 거야.
그날 남편과 시아주버님이 드디어 풀뽑기에 도전했다. 그것도 태양이 내리쪼이는 한낮 정오에...... 아마 동네사람들이 감동할지도 모른다며 우쭐 대면서 말이다.
'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사람들이 하룻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르구 약안치구 농사짓는다고 하는거
나 아닌지 모르겠네~~'
하는 표정이었던 그 사람이, 밭 갈러 왔다가 죄다 손으로 뽑아놓은 풀포기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 진다.
나는 혼자 편한게 미안해서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방치해 놓았던 푸세식 화장실 청소가 말처럼 쉬운게 아니었다. 거미줄이랑 벌레들까지 가세한 터라 비위가 약한 나는 스스로도 변한 모습에 놀라면서 아주 말끔히 닦아놓고는 자랑스럽고도 대견한 마음에 몇 번이고 깨끗해진 화장실 문을 열어보곤 했다. 청소를 끝내고 나와보니 밭이 깨끗해졌다. 이젠 농사지을 만하다. 남편은 밭에 거름을 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갈아서 곡식을 심는 것이 순서라면서.
우리가 농사지을 때를 놓친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번에 임대받았던 사람이 물관리를 잘 하지 못해 물이 말라버린 것이다. 내가 듣기론 ‘건수’라는 것은 땅밑에 고이는 지하수가 한곳에 모이는 물을 일컫는 말이란다. 자주 퍼내지 않고 방치하면 말라버릴 수도 있는 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터를 연결시키면 조금 나오다말다 하는 정도이니 농사는 언감생심 꿈도 못꾸었던 상황이었다. 교육청직원이 나와보고서는 안되겠던지 관정을 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관청에서 하는 일이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바람에 농사가 늦어진 것이다. 물이 없는데야 어쩔수 없지 않은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그냥이라도 심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다행히 며칠전 결제가 되어 예산이 나왔으니 물을 파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쫄쫄 나오던 건수가 자꾸 퍼내니 다행히 조금씩 양이 늘어나 우리가 농사지을 만큼은 될것같다.. 모터의 힘에 지하 저 밑에서 끌어올려지는 물은 불규칙하기 짝이 없다. 한번에 확 나오다간 금새 멎어버리고 또 얼마를 꾸르럭 대다간 또 한번 확 내뿜고 그담엔 금방 졸졸..... 하루종일 그러면서 물을 끌어올린다. 그런데 그 물이 어찌나 차갑고 시원한지 그저 고마울따름이다. 우물을 새로 파기 전까진 그 물에 의존하는 수밖에.......
문제의 그 물은 학교 뒷산 둔덕에 있다. 그걸 끌어 내리자니 호스가 필요한데 거의 100미터 정도가 있어야 한단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호스들을 다 연결해도 반밖에 되질 않지만 그래도 밭과의 거리를 좁혀야 덜 고생을 하겠기에 호스 연결 작업을 먼저 시작했다.
그런것도 할 줄 아는 남편을 보니 대단해 보인다. 입으로 호스를 빨아들이니 그 압력으로 드디어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어쨌든 물과 밭과의 반거리는 줄인셈이니 말이다. 농사초년에 고된 신고식을 치루는 셈으로 물뿌리개에 물을 퍼나르기로 하고 드디어 일을 시작했다.
제일먼저 할일은 밭에 비닐을 씌워 망을 짓는 일이다. 폭이 1미터나 되는 검은 비닐롤을 풀어 밭에 얹어놓고는 흙으로 드문드문 괴어놓은 다음 삽으로 흙을 퍼 얹어 양쪽을 누르는 작업을 한다. 그런 다음 기다란 나무막대기와 망치를 이용해 비닐에 구멍을 낸다(이 작업은 힘센 남편외에는 달리 할 사람이 없다.). 그리고는 그곳에 물을 충분히 부어준 다음 모종을 심고 흙을 메워 꾹꾹 눌러주면 일단 심기는 완성이다.
담당-비닐씌우기: 남편과 나
-삽으로 흙을 퍼올려 비닐 누르기:시아주버님과 남편
-흙구멍에 물 붓기: 나랑 자기 일 끝내고 시간 남는 남편
-모종을 심고 흙채워 다지기 : 시어머님 그리고 자기할일 다 마친 나머지 인원 모두.
우리는 분업이 착착 잘 되는 한 팀같았다. 남편은 빠지는 작업이 없다. 조장이니 그렇지 뭐. 그래야 생전에 일부러 시간내서 운동하는걸 질색하는 남편의 지방간도 없어질 것 아냐?
고생하는건 미안하지만 내심 다행이다 싶다. 웰빙이 별건가 뭐.
근데 말이 농사지 중노동이다. 해가 내리쬐는 한낮에 바람도 많이 안부는 날에 양손에 물 가득 담은 물뿌리개를 들고 나르자니 이만저만 고된 게 아니다.
첩첩산중 시골 아낙네 옷차림에 신발은 파랑고무신(이것이 가볍고도 편하다)에 챙 넓은 밀짚모자 차림이다. 누가 몰카로 찍는건 아니겠지? 하지만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던가? 차림이야 어쨌건 맘은 어릴적 오빠들 삽질하는 집앞 텃밭에 와 있는 느낌이다. 모종 심다가 땅에 털석 주저앉아도 누가 뭐랄 사람 없고 흙냄새 솔솔 맡노라면 가끔 시원한 바람이 땀을 적셔주기도 한다. 그래 이 느낌이야. 자연과 벗삼는다는 건.
우리 어머님은 단 일분도 쉬질 않으신다. 덩달아 나도 쉬질 못하니 그게 문제다. 어머님이 쉬어야 나도 쉴텐데...... 팔순 노인네가 기운도 좋으시다. 언제쯤이나 지치시려나... 오히려 나보다 더 쌩쌩하신것처럼 보이시니..
벌써 2시가 다 되었다. 점심 준비를 해야 하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부랴부랴 부엌으로 갔다. 밥을 아까 전기밥솥에 꽂아 놓고 집에서 싸온 반찬 몇가지 꺼내놓는다.
원형식탁(이건 어머님이 아파트에 내다 버린걸 주워오셨는데 나무도 좋고 튼튼해 깨끗이 닦아 가져다 놓는 것이다. 예쁜 식탁보를 씌우면 훌륭하겠다. 내겐 그런 재주가 있다 )에 상을 차렸다.
메뉴: 어머님이 만드신 알맞게 익은 열무김치( 사실 이거 하나면 충분하다)
-운동장가에서 뜯은 씅애나물, 미나리싹, 상추+ 어머님이 양념해 오신 맛있는 고추장
-막 뜯어온, 숲속에 무리지어 돋아있는 자연산 돗나물 약간
- 돼지고기 고추장 볶음
-콩자반과 멸치볶음
-desert: 커피한잔과 냉장고에 있던 시원한 수박
“식사하고 하세요오오~~~~~~~~~~~~~
밭에다 대고 소리친다.
손을 깨끗이 씻고 상추를 비롯한 온갖 쌈거리들을 겹쳐 얹은 후 돼지고기볶음 한젓가락을 싸서 고추장을 곁들어 먹는 그 맛! 노동후에 맛보는 이 맛이야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맛이다.
“식사후에 마시는 커피는 누가 뭐래도 나는 벤치에 앉아서 푸르른 자연을 바라보면서 마실거야
종이잔에 믹스커피를 타 들고 밖으로 나온다. 도시의 찻집에서 마시는 커피에 뭔가를 첨가한 또다른 맛이 커피를 한결 맛나게 한다. 자연의 운치와 여유를 첨가한 맛의 묘미를 누가 알랴.
설거지거리를 들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시원치않게 뿜어내는 물줄기지만 고맙기만 하다. 이만큼만이라도 감지덕지지. 더구나 차갑고 맑은 물임에야... 설거지하는 일이 귀찮기는 커녕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물이다. 갑자기 무언가 터벅하고 풀숲으로 떨어졌다. 깜짝놀라 보니 보기드문 주먹만한 참개구리이다. 청개구리만 있는줄 알았는데 정말 오랜만이다.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설거지하는 내내 옆에 앉아 있다. 한편 징그럽기도 하니 그만 가줬으면 좋겠는데 눈치가 없다. 불규칙하게 뿜어내는 물줄기에 옷이 반은 젖었지만 어떠랴.
오전내내 열심히 심느라고 애썼건만 아직도 할일이 태산이다.
서너시쯤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이란게 한번에 끝내야지 일단 쉬었다가 하면 더 힘드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정말 모종을 너무 많이 산거 아냐? 해도해도 끝이 없네. 어머님이 말릴때 들을걸. 늦은 후회를 한다.
아무래도 낼 다시 해야겠다. 오늘 다하는 건 무리인것 같다. 해도 저물어가니 모두들 그러자는 의견이다. 그래, 밭이 너무 넓은것도 이럴땐 흠이다. 발에 흙을 털고 시원한 물로 얼굴과 손발을 씻었다.
고무신을 벗고 뽀족구두를 다시 신는 기분이 묘하다. 밀짚모자 벗고 예쁜 챙모자 다시쓰는 상쾌함이랄까?
집으로 오는길은 잠에 떨어졌었기에 기억이 없다. 낼두 일할수 있을까? 삭신이 쑤실텐데... 은근히 걱정이 된다. 농사꾼되는일이 쉽지만은 않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의 말처럼 ‘내일일은 내일 걱정'하기로 하자.
2006년 6월 5일
그제 다 못한 마무리를 다시 시작했다.
오늘도 역시 우리는 한나절에 도착했다. 아침일찍 떠나자는 어머님의 성화는 또 불발이 됐다. 하지만 운좋게도 오늘은 흐린날이다. 바람도 제법 많고. 일하기 좋은 날씨다. 호스가 짧아 힘들었던 생각이 났는지 남편은 오는길에 두촌면에 들러 호스를 구입했다. 오늘은 훨씬 수월할 것 같다.
물뿌리개로 물을 나르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 말이다.
2006년 6월 6일
아이들이 집에 있는 공휴일인데도 우린 물로리로 향했다.
어제 심다 남은 고구마싹을 마저 심어야 한다는 어머님의 은근한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 느즈막한 시간(거의 12시가 다 되어서)에 도착했다. 점심부터 먹고 하자는 우리들의 의견에 마지못해 동의하신 어머님은 맘이 급하셔서 점심 준비하는 동안에도 벌써 밭에 나가 계셨다. 오랜만에 삼겹살을 바비큐통에 얹어 구워 먹으니 맛이 일품이다.
날씨가 흐린 것이 다행이다. 뜨겁지 않게 일할수 있으니 말이다.
어제 망을 지어 놓은 밭 두고랑이 남았는데 어머님은 벌써 그곳에 배추씨를 뿌리고 계셨다. 솎아서 국 끓여먹으면 일품이라고 몇 번이고 말씀하셔서 오는길에 두촌면 종묘사에서 구입한 것이다.
커피타임을 좀 더 오래 갖고 싶었지만 밭에 나가계신 어머님이 맘에 걸려 어제 심다 남은 고구마순을 들고 호미랑 물뿌리개를 챙겨 누가 떠밀기라도 하듯 밭으로 나갔다. 헌데 오늘은 웬지 일이 전날보다 더 고되다고 느껴진다. 벌써 있는 힘 다 써버린건 아닌지 모르겠다.
<고구마 심기>
어쨌든 일을 시작했다.
먼저 고랑을 곡괭이로 길게 파고 나서 물을 붓고 흙을 적신 후 고구마순을 눕혀서 심는다. 그리고는 이파리 끝부분만 남겨놓고 뿌리가 젖은 흙에 잘 묻히도록 심은후 마른 흙을 덮어 수분증발을 막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심어도 모종이 줄어들지를 않는다. 너무 늦게 심어 열매가 제대로 달릴지 의문이라는 어머님의 말씀이 나를 힘빠지게 한다. 2시간정도 걸려 심고 니 맥이 빠진다. 땅끝에서 뿜어나온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땀에 범벅이 된 옷들을 갈아입고 나니 개운하다.
앞으로 며칠간은 좀 쉬어야겠다. 초반에 너무 무리를 하는 것 같으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잠에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농삿일 하느라 고생 한 생각을 하면 나중에 고구마가 많이 달려두 아무도 못줄 것 같다. 하지만 농사꾼의 마음씀씀이가 그러면 되겠냐는 남편의 뼈있는 말에 움찔해진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인 것을 어찌 모르랴. 운동장에서 뜯은 돗나물을 801호에 좀 갖다주어야겠다. 약도 안친 자연산 돗나물이니 이보다 좋은 웰빙식품이 어디 있겠는가.
2006년 6월 8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걸 집 거실에 앉아 내다본다.
그제 심은 고구마랑 고추랑 잘 자라겠다. 그새 농사꾼이라도 다 된 양 비오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도 전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곧이어 장마가 온다면 지장이 있을거라는 시어머님 말씀이 맘에 걸린다. 비가 많이 와도 걱정. 안와도 걱정. 농사일이 쉽지만은 않다.
어쨌든 비가 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그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밖에 나간 자식을 걱정하는 맘이랑 밭에 심어놓은 곡식 걱정하는 맘이랑 비슷한것일지도 모른다.
밭에 한번 가보고 싶다. 빗물에 떠내려가는거 아냐?
2006년 6월13일
한동안 바빠 물로리에 가지 못했다가 오랜만에 가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열일 제쳐두고 밭으로 나가보았다. 내가 심은 씨앗들이 좀 나왔는지 궁금해서이다.
어머나 저 새싹좀 봐. 신기하고도 대견한 모습! 무리지어 오종종하게 고개를 내민 싹들에게 듬뿍 애정이 간다. 그런데 씨앗을 뿌린 결과가 한눈에 들어온다. 골고루 뿌려야 하는데 어느곳은 무리지어 있고 또 어느곳은 뜸하다. 내가 한 일들이 언젠간 백일하게 드러나 결코 숨길 수 없는 순간들이 온다니까!
싹만 보고는 무슨싹인지 구별하기 힘드네... 어머님은 대번에 알아보시련만 난 아무래도 좀 더 자란 다음에 알아볼 일이다.
뿌린 씨앗이 모두 나온 것은 아니다. 종자가 오래 된 것들은 싹을 틔우지 않은 모양이다. 아님 더디 나오는 종류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특히 꽃씨들은 아직 눈에 안띄네? 제일루 기다리는 것들인데 말이다.
가장 빨리 자라는 것은 수세미와 조롱박이다. 다른 채소들과 같이 심었는데도 벌써 한뼘이나 자랐다. 수세미는 어느새 자신이 감아 올라갈 나무를 이리저리 찾고 있었다. 나는 그 여린 새순을 옆에 있는 큰 나무밑둥에 살짝 대어놓았다. 쉽게 찾아 올라가라고..... 그러면서 눈을 감는다.
가을이 되었을때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 양옆으로 수세미와 조롱박을 심었으니 이것들이 자라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남편에게 아치형
구름다리를 만들어 댈래야 겠다. 그러면 구름다리 아래로 주렁주렁 달릴 수세미와 조롱박을
바라보며 올 가을은 먹지 않아도 배부르겠다.'
나는 미리 행복해진다.
육신의 배부름을 위한 수확을 기대하기 보다는 자연속에서 순수해질 마음과 영혼의 배부름을 더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어머님도 그러실른지 모르겠다.
사실 소출이 얼마나 나올까--에 대한 기대감은 아직 없다. 전문농사꾼이 되려면 아직 멀었나보다.
정오를 지나면서 하늘에 먹구름이 피더니 비가 오기 시작한다.
지난번 비 온 뒤로 모종으로 심은 고구마와 고추가 제법 자리를 잡았었다.
아직 콩알만한 떡잎뿐인 싹들이 비에 뿌리가 패이지 않도록 조금만 와야 할텐데.......
운동장 가장자리로 돌아가면서 들꽃이 활짝 피었다. 국화꽃과 코스모스꽃을 반반씩 닮은 이름모를 하얀 들꽃이 만발한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 마치 꿈속 동화나라에 와 있는듯한 착각이 인다. 며칠 전부터는 노란꽃( 아마도 토종이 아닌 수입종자인가 보다)도 합세를 해서 운동장이 화려하다. 제법 오래가는 꽃들이라 한동안 호강을 할 것 같다.
운동장에서 학교 건물로 올라가는 제법 높은 계단이 있는데 그 옆으로는 온통 산딸기 밭이다.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면서 더 이상 숨지 못하고 들킨 것이다. '어머나!'를 연발하며 딸기를 땄다. 인간의 눈에 띈 벌로 더 이상 존재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한바구니 따서 술도 담그고 믹서에 갈아 쥬스도 만들어야지. 주위에 온통 뽕나무가 무성하니 오디열매 또한 지천이다. 그냥 둘리 없지. 많이 따서 애들 갖다줘야지. 하 지만 생각처럼 오디따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나무 꼭대기에 달린 것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아쉽지만 포기하는 수밖에....
2006년. 6월. 14일
오늘은 남편과 시댁식구들만 물로리에 들어가셨다. 저녁에 돌아온 남편은 춘천에서 볼일이 있었던 관계로 함께 가지 못한 내게 하루를 보고하느라 바쁘다.
오늘은 호박씨 심었던 것 하나하나 옮겨 심었고, 옥수수 씨앗과 콩을 밭 가장자리로 돌아가면서 심었단다. 화단을 깨끗이 정리하고 꽃나무들을 이리저리 적당한 자리로 옮겨 심었다고도 했다. 매일 수고함으로 인해 하나씩 제자리들을 잡아가고 있으니 이제 머지 않아 행복한 마음으로 감상 해도 좋을 날이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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