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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에 빠지다

이제쯤은산촌에서 2011. 2. 20. 17:42

 

 내가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꼭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7시 40분에 EBS방송에서 방영하는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이 그것이다. 예전에 방영했던 만화를 요즘 다시 재방영하는 것이다.

“빨강머리 앤‘은 20여년전 아이들이 어렸을때 함께 시청했었던 TV만화이다.

내게 아름다운 작품으로 기억되는 만화영화가 두편 있는데 하나는 ‘플란다스의 개’이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빨강머리 앤‘이다. 이들은 비록 어린이용 만화라 할지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며 잔잔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던 작품이라 내가 애들보다 더 열심히 시청했던 기억이 난다.

그랬기에 재방영하는 ‘앤’을 만났을때 나는 앞서 지나친 몇 회분을 꽤 아쉬워했었다. 인터넷에서 아무래도 다시보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부모가 없는 고아로 자라난 ‘앤“을 나이많은 남매 ”마릴라“와 ”매튜“가 입양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초록색지붕집‘으로 데려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불행한 환경의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천성적으로 밝고 낙천적인, 그러나 한편으론 소녀다운 세심함과 성실함을 잃지 않은 사랑스런 소녀 으로 인해, 외로웠던 ‘마릴라’와 ‘매튜’는 삶의 의욕과 활력을 얻게 된다. 하루하루 지내는 과 그들의 일상이 잔잔하게 만화속에 그려져 있어서 마음을 참 편안하게 해 주는 몇 안되는 작품이라 여겨진다.

 

내가 이 작품에 빠져드는 것은 작가가 ‘앤’의 대사를 통해 쏟아내는 순수한 소녀의 세심한 정신세계이다.

편리한 생활환경, 물질적 풍요와 첨단과학을 얻은 대신 우리들이 오늘날 잃어버린 인간존중과 순수함에 대한 그리움을 이 작품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해소될수 있는 것이다.

 

고아시절, 친구도 없이 늘 외로이 지내던 은 초록색지붕집에 와서 세상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친구 ‘다이아나’를 만나게 된다. 다이아나이 매일 만나서 나누는 얘기속에는 요즘 애들에겐 좀처럼 대하기 쉽지않은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가 잔잔하게 흐르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짓게 하는 힘이 있다.. 작가는 유년기에, 순수하면서도 꿈많은 소녀들이 가질수 있는 세심한 감정 한조각까지라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으므로 나의 찬사를 얻어내고 있는 것이다.

 

‘앤’의 양육을 맡은 ‘마릴라’는 에게 겉으로는 엄격하게 대하면서 잠시의 일탈도 허락하지 않고 훈육하지만 마음은 누구보다도 앤을 사랑하고 아낀다. 을 향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기엔 그녀의 성격이 너무도 보수적이다. 그녀의 오라버니 ‘매튜’ 또한 을 사랑하는 마음이 끔찍하지만, 이 학예회에서 입을 드레스를(대부분의 소녀들이 입었던 드레스를 마릴라는 사치를 가르치는 일이라고 반대했으므로) 몰래 ‘린드부인’에게 부탁해 만들어주는 것으로 그의 마음을 표현할 뿐 내색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들의 사랑을 현란한 말로 표현했다면 분명 그들 마음속에 있는 을 향한 넘치는 사랑의 분량을 반만큼도 다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엔 그 시절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심성이 그와 별반 다를바 없었다, 사람사이에 정이 넘쳤고 순수했으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잔꾀가 없었고, 서로의 관계속에서 인간에게 있어야 할 ‘도리’라는 걸 소중하게 여길줄 아는 ‘기본됨’이 있었다.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하진 못했으나 불행하다고 느끼며 원망하기 보다는 그저 담담함으로 삶을 받아들임으로써 서로에게 위안이 될수 있는 이웃으로 남곤 했다.

그 시절의 정서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마음 이상의 정을 서로가 느낄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인간사회는 모름지기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저개발국가에서 선진국으로 탈바꿈하며 빈곤과 풍요를 모두 겪어왔던 우리가 이제와 깨닫게 되는 소중한 그것은 ‘사람은 환경에 관계없이 ’인간적‘본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는 사실일게다.

 

‘앤’은 또한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소녀이다. 외로운 ‘마릴라’와 ‘매튜’에게 삶의 이유가 되며 그녀의 빈자리를 견딜수 없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소녀이다. 부잣집 상속녀가 될 기회도 있었으나 그녀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마릴라’와 ‘매튜’를 선택한다.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선뜻 동의할수 없는 인간적 선택이야말로 정신적 메마름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요즘은 사람들이 때로 무섭기까지 하다. 이해타산에 관련된 것이라면 하루아침에 안면을 바꾸곤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나를 점점 왜소하게 만들어 간다. 똑똑한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정스러운 사람들은 점점 보기 힘들어지고, 자연환경조차도 재앙이라 할 만큼 피폐되어 가는 세태이기에 ‘앤’이 살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오늘 아침엔 그녀를 사랑으로 키워준 ‘매튜’가 심장발작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고 그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며 흐느끼는 ‘앤’을 바라보며 나도 함께 울기까지 했다.

요즘은 남편의 출근시간이 좀 늦어질때면 ‘빨강머리앤’을 못보게 될까봐 빨리 출근하라고 남편을 재촉하기에 이를만큼 나는 앤과 마릴라, 그리고 매튜에게 빠져있다.. 이 작은 행복도 프로그램의 종영과 함께 머잖아 사라지겠지만 한동안 ‘앤’의 소박한 팬으로 남을것 같다.

 

나도 나이를 먹는지 요음 종종 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군중속의 고독’이란 말이 해를 거듭할 수록 더 마음에 와닿는다

주변에 사람은 많되 또한 사람이 없다. 진실한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앤’에게 있어 ‘다이아나’와 같은 진실된 친구가 한사람이라도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리.

몸은 나이를 먹더라도 마음만은 ‘앤 셜리’처럼 언제까지나 꿈많고 긍정적 사고의 소유자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또 다시 앞으로 남은 나의 소중한 날들을 느리게, 빈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리라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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