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열살쯤 되었을 때 얼음이 풀리고 종달새가 하늘위로 날아다니고서도 한참을 지나 4월중순쯤 되는 일요일을 잡아, 엄마는 오빠들 손에 삽을 쥐어주며 밭을 파게 하셨다. 초등학교 초년생이었던 내게 오빠들은 꼭 어른이다. 그날은 나도 덩달아 맘이 한없이 들뜨곤 한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길 것 같아 마당앞에 놓인 삽자루를 쥐어보기도 하고, 내 발엔 영 맞지 않는 커다란 고무신을 질질 끌며 밭두렁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면서 오빠들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었지만, 남을 배려를 하기엔 너무 어렸으므로 내겐 아랑곳없는 일이었다.
힘이 센 오빠들은 밭을 몇구역으로 나누어 놓고 삽으로 퍼뒤집고 난후 쇠스랑 으로 흙을 펴면서 굵은 돌은 골라내고 흙덩이는 잘게 부수어 씨앗을 심기 좋게 손질을 한다. 손이며 얼굴 콧잔등이며 발에 잔뜩 흙으로 뒤집어쓴 오빠들이 잠시 쉬노라면 나는 우리집의 자랑거리였던 뽐뿌물(여름엔 얼음처럼 차고 겨울엔 온수가 되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을 퍼내어 냉수대접을 떠다주곤 하였다. 밭에서 나오는 땅강아지랑 지렁이, 쥐며느리등의 벌레들을 나뭇가지로 찔러보면서 이리저리 끌고다니며 괴롭혔던 악동(?)의 기억이 나를 미소짓게 한다. 짐짓 무서운 티라도 낼라치면 큰오빠는 얼른 잡아 저 멀리로 던져주며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밭고랑을 대여섯개쯤 낼 수 있을 정도로 정리가 다 된 밭에 엄마는 곡괭이로 줄을 맞춰 골을 낸 다음 엄마의 희망을 하나둘씩 심으셨다. 고추, 배추, 가지. 감자. 가지, 콩, 파. 상추. 그리고 또 뭐였더라? 맞아! 장대같이 긴 옥수수도 심으셨다. 그리고는 손으로 살살 흙을 덮으시는 것이다. 며칠후 밭에는 여리디 여린 어린 싹들이 서로 키재기를 하듯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라오고 우리엄마의 희망도 그만큼 커진다. 기다리던 약비라도 내릴라치면 엄마는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 물고랑을 만드느라 비를 맞는것도 개의치 않으셨다. 채소들이 어느정도 제 몫을 할 정도로 자라나면 엄마는 아침일찍 텃밭에 나가 배추며 열무등을 솎아 국도 끓이고 물에 데쳐 무쳐먹기도 했다. 그리고는 한소쿠리씩 넉넉히 뜯어서 옆집과 나눠먹는걸 잊지 않으셨다.
한여름엔 점심에 밭에서 방금 뜯은 상추를 상에 얹어 쌈을 싼다. 싱싱한 상추쌈은 밥과 고추장만 있어도 별미였다.상추쌈은 뜨거운 밥보다는 찬밥으로 싸먹는 것이 훨씬 맛있다. 여름용 식단으론 그만인 것이다.
요즘은 가지를 날로 먹지 않지만 그시절엔 밭에 나가 한뼘만큼 자란 가지 열매를 따서 그냥 먹어도 맛이 있었다. 어머니는 더 자라길 기대하셨겠지만 간식거리가 따로 없던 시절이라 난 채 다 자라지도 않은 가지열매를 엄마몰래 따먹곤 했다.
입추가 될 즈음 어머니는 끝물이 된 상추랑 푸성귀밭을 갈아 김장 배추랑 무우를 심으신다. 하지만 대식구였던 우리집의 김장을 대신할만큼은 아니 어서 김장용 배추는 겨울에 따로 구입하셨고 그저 어린 잎을 솎아먹기도 하고 얼갈이배추로 김치도 담그고 하셨다
늦여름이 되면 배추 무우와 함께 꽃들도 한창 절정을 맞이한다 엄마는 꽃을 좋아하셔서 마당에 여러 가지 종류의 꽃을 가꾸셨으므로 한여름 우리집 꽃밭은 화려했다. 키작은 봉숭아, 한련화, 채송화는 가장 흔하면서도 아름다운 꽃들이다. 키가 큰 다알리아. 나리꽃. 접시꽃........... 앞마당 꽃밭을 풍성하게 했던 내마음의 추억의 꽃들이다.
맑은 날이 계속된 어느날을 골라 (비온 뒤에 딴 꽃은 물이 잘 들지.않는다) 봉숭아물을 들이는 날이면 저녁때쯤(봉숭아물을 들이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냥 자야하므로 자기 전에 들인다) 나랑 언니랑 옆집사는 창숙이랑 함께 모여 꽃을 딴다.하얀꽃과 분홍꽃을 함께 따고 이파리도 제법 많이 곁들인다. 그리고는 크고 매끄러운 둥그런 자갈돌을 골라 찧기 시작한다. 어느정도 즙이 나올쯤엔 백반을 조금 넣어 함께 간 다음 마을 어귀에서 미리 따 두었던 피마자 잎과 굵은 면실을 준비해서 봉숭아물을 들이기 시작한다. 마음씨가 착했던 언니는 나랑 창숙이랑 먼저 들여주고 맨 나중에 자신의 손톱에 물을 들였다. 짙은 초록색으로 갈아진 봉숭아즙을 손톱위에 도톰 하게 살짝 올려놓고 적당하게 잘라놓은 피마자 잎으로 즙이 흐르지 않도록 잘 감싼 다음 실로 몇 번이고 칭칭 감아 싸맨다. 새끼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중지까지만 들이고는 엄지와 검지는 되도록 남겨두곤 했다.(좀 더 멋쟁이인 사람들은 엄지발가락까지 들이곤 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손가락까지 봉숭아물로 빨갛게 물들여져 있곤 했다. 봉숭아물을 들이는 날엔 잠을 충분히 잘 수 없었다. 손가락을 가슴위로 올려 망가지지 않도록 신경쓰느라 옅은 잠을 잘 뿐이다. 내손톱이 가장 예쁘게 물들기를 기대하면서....하지만 깊은 잠에 빠진 담에까지 얌전할 수는 없는일! 그다음은 그저 운명에 맡길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먼저 싸맨 손톱을 풀어 보는 데 나는 기대감에 쌓여 얼른 풀지 못하고 좀 더 놔두곤 했다. 그러다가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내 드디어 손톱을 풀면 어제밤 그리도 가지런히 얹어놓았던 봉숭아더미는 어디로 갔는지 빈 손톱만 남아있기 일쑤이고 ,일부는 아예 이부자리속에 남아있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속상하지만 할수 없는일! 그래도 누구의 것이 더 진하게 물들었는지 서로 비교하느라 아침내내 수선들이었다. 때론 손톱에만 예쁘게 들여져야 할 봉숭아물이 살갗에도 진하게 물들여져 몇달간이나 빨간 손으로 지내야 할 때도 있었다.
가끔 친정에 갈 일이 있을때 옛날 앨범을 꺼내볼때면 흑백이나마 꽃밭 앞에서 찍은 그시절의 사진을 보면서 그리움의 미소를 짓곤 한다.
엄마의 텃밭에서 우리가 제일 기다린 것은 옥수수이다. 옥수수는 다른 채소들보다 더디 익는 편이어서 여름 내내 옥수수 익기를 기다리는데는 적지않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고추잠자리가 옥수수밭에 부쩍 많아질 때면 옥수수를 딸때가 된것이다. 엄마는 소쿠리를 들고 밭에 나가 옥수수 수염이 마른 놈을 골라 손톱으로 살짝 까서 익은정도를 확인한 다음 단단히 여물었으면 주저없이 옥수수를 꺽어 딴다. 그리고는 커다란 양은솥에 껍질을 한두겹정도만 남겨놓은 옥수수를 넣고 푹 쪄낸다. 엄마는 방금 따서 쪄낸 뜨거운 옥수수를 젓가락에 끼워 우리들에게 나눠주시곤 했다. 그 맛을 어디에다 비기랴. 옥수수는 열매를 다 따고 난 뒤 줄기(대)의 껍질을 깎아 긴 채로 입에 넣어 재미삼아 씹어먹기도 했다. 한참을 씹다가 단물이 빠지면 다시 뱉어내곤 했다. 그요즘 아이들은 그 맛을 모를게다.
고구마를 캐는 날이면 얼마나 설레는지.....먼저 땅을 뒤덮고 있는 넝쿨처럼 뻗어있는 줄기를 걷어내고 볼록 솟아있는 땅을 호미로 살며시 옆쪽에서부터 파내려갈 때의 그 설레임! 잠깐 아껴두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느릿느릿 호미질을 하다가 행여 호미등에 생채기라도 날라치면 아뿔싸! 아깝다.
흠없이 고구마를 캐는 일도 일종의 기술이리라. 때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새끼 손가락만한 실고구마가 나올때의 실망감이란.! 반면에 어른 주먹만한 것일때엔 세상에 없는 노다지를 캔것같다.
고구마줄기를 따는 일이 놀이중에 제일가는 놀이였다. 나란히 붙어있는 줄기를 끝부터 잡고서 주루룩 내려 제끼면 한달음에 손안 하나가득 고구마순이 들어온다. 그런다음 이파리를 하나씩 떼어내면 말간 빛깔의 줄기만 기다랗게 남게 되는데 그럴때면 나는 내심 허망한 느낌이 들곤 했다.잎이 무성한 고구마밭의 잔상이 아직도 남아 있던 끝이니..... 엄마는 그것을 가지고 고구마 물김치를 담그시기도 하고 말려서 나물을 볶기도 하셨다. 고구마 물김치는 그시절이 지나고 나서는 한번도 맛보지 못한 추억의 음식이 되었다. 고구마줄기는 끊어지지 않게 이쪽저쪽 번갈아 벗겨 길에 이으면 목걸이가 된다. 세상에서 제일루 예쁜 고구마목걸이!
겨울에 고구마를 날로 깍아 먹는 맛도 일품이다. 근데 지금은 왜 그리도 맛이 없는지..... 우리 애들은 익혀야만 먹는줄로 안다
세월이 많이 지났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진것은 사실이나 정신적인 허전함은 그 어느때보다 큰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그시절의 그리운 추억들로 인해 삶의 무게로 한껏 메마른 내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중요한 보석이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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