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들 계시죠?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네요. 막내아들이 군복무중이라 그런지 저에겐 올겨울 강추위가 야속하게만 느껴집니다. 감기 들지 마세요. 요새 감기 무척 괴롭더군요. 모처럼 한가한 시간들이 주어진다 했더니 기침때문에 꼼짝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나이를 먹나봅니다. 감기드는게 두려운걸 보니 말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엔 정말 추웠습니다. 요즘 추위가 제 어린시절 겪었던 혹한을 생각나게 하네요.
해서 어린시절의 겨울추억으로 잠시 되돌아가보려고 합니다. 추억속에 남아있는 그 겨울날들의 힘들었던 기억은 간데없고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합니다.
*****************
그때는 왜 그리도 겨울이 추웠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먹을것과 입을것이 넉넉지 않을 세월이라 그랬을 겁니다. 영하20도가 되는 날에도 언니가 입다가 물려준 곤색 학생 코트가 방한복의 전부였습니다. 그나마 그것조차도 그시절의 아이들에겐 사치였죠.
전쟁이 끝나고 고작 10여년이 지난 때이니 아직까지 정부가 국민들의 춥고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므로 너나할것 없이 모두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집집마다 자녀들이 5~10명은 보통이었던 데다가 아버지 혼자 생계를 책임지던 시절이었기에 결코 넉넉할 수는 없었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된지 얼마 안되었던 1960년대 초반엔 정치적으로도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우리 옆집에 사는 서울대생 오빠가 데모하다가 (한일수교반대데모로 기억됩니다) 교도소에 갔다고 어른들이 수근대며 걱정하곤 하던 때였으니까요. 어린 우리들은 어른들의 골치 아픈 정치관심사야 어찌됐던 그저 따뜻한 옷과 맛있는 먹을것만 있으면 더 바랄것이 없었습니다.
예전엔 날씨가 일찍 추웠던 탓에 10월중순쯤이면 벌써 김장을 서두르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두어정류장쯤 떨어져 있던 시장에서 배추를 200포기 정도(2접) 사오곤 하셨습니다. 일곱식구가 겨우내 먹어야 할 식량이니 그정도도 결코 충분하진 않았지요. 지금도 눈발이 몹시 날리는 날 아저씨들이 배추를 날라다 마당에 쌓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배추를 들여오는 날엔 웬지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곤 했죠.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두 모여 이집 저집 돌아가며 날짜가 겹치지 않도록 정해 김장을 담그곤 했습니다. 우리집이 김장을 담그는 날 아침이면 저는 학교에 가기 싫은 발걸음을 떼어야 했습니다.
김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지요. 그것만큼 특별한 구경거리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학교에 있어도 그날은 온통 집 생각 뿐이었습니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도착할때쯤이면 어머니는 벌써 땅에 묻어놓은 커다란 항아리에 거의 다 담아놓을 때 쯤이 됩니다.
그리곤 수고하신 동네 아줌마들과 애들이 방 하나가득 모여앉아 맛있는 점심을 먹습니다. 그날만은 어머니가 배추된장국에 쇠고기를 넣으셨고 갓담근 김치와 돼지고기보쌈을 대접하셨으므로 식사는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가 막힌 맛이었답니다. 당시엔 특별한 날이 아니고는 맛볼수 없는 음식이었으니까요.
집채만한 김장독을 대여섯개씩 마당에 묻어두고 겨우내 김치하나로 밥반찬을 대신했지만 그 맛을 결코 잊을수는 없습니다. 배추김치는 기본이고 총각김치, 깍뚜기, 동치미, 짠지김치.. ........
어느새 김치독 하나를 거의 비울 때면 나는 김치를 꺼내려다 항아리 속으로 빨려 들어갈 뻔 한 적도 많았습니다. 항아리는 내 키보다 훨씬 깊었으니까요. 볏짚으로 만든 김치광<일종의 저장고로서 삼각모양으로 조그맣게 지은 곳간) 은 제 어린 절의 피난처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조금은 센티멘탈한 기질이 있었는지 눈오는 날엔 김치광의 짚문을 가만히 열어놓고 가마니를 덮어놓은 김칫독위에 혼자 앉아 잿빛 하늘을 바라보며 휘날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을 즐기곤 했습니다.
눈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김치를 듬뿍넣은 밀가루 부침개를 시작하셨는데 형제가 많았던 터라 미처 부쳐내기도 전에 빈 젓가락을 들고 기다리곤 했었지요.
겨울방학후 개학이 아직 많이 남아 있던 정월, 밖에서 신나게 뛰어놀다 들어온 다섯이나 되는 우리 형제들은, 저녁먹고 난 뒤 올망졸망 따끈한 아랫목에 발 들이밀고 앉아 서로 이불자락을 끌어당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자상했던 큰오빠는 그럴때면 의례히 동생들을 상대로 옛날얘기를 꺼냅니다. 그중에서도 정말 재미있었던 얘기가 바로 '손오공' 이었습니다.
큰오빠는 그 이야기를 하루에 다 끝내질 않고 클라이맥스 부분을 막 얘기하려던 차에 꼭 다음날로 미루었으므로 ,우리들은 다음 얘기가 궁금해서 이불속에 함께 모이게 될 그시간을 학수고대하곤 했습니다.
그럴때면 어머니는 마당에 묻어두었던 무를 파내어 깎아주시곤 했는데, 옛날얘기 들으며 한겨울에 맛보는 차가운 날무의 맛이란! 그시절엔 무얼 먹어도 맛있었어요.
엄마는 또 겨울이 시작되면 늘 고구마를 가마니로 사서 뒷 광에 넣어 두시고는 겨우내 우리 오형제의 간식거리로 깎아주시곤 했습니다. 요즘은 고구마를 굽거나 찌거나 해서 먹지만 그땐 그냥 깎아먹는 맛이 일품이었지요.
요즘처럼 학원갈 일도 없었던 겨울방학 내내 놀이감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작은 돌 하나라도 우리 5형제에겐 신나는 놀이감이었으니까요.
비석치기, 자치기, 고드름따먹기 (그땐 정말 고드름도 흔했는데...). 엿치기...............
우리집은 일본식 기와집이었는데 눈이 오고 나면 지붕에 쌓여있던 눈이 녹으면서 처마에 흘러내리다가 날이 추워지면 얼어붙으며 기다란 고드름을 만듭니다. 그러면 동네아이들과 긴 막대기로 고드름을 따면서 누가 제일 긴 고드름을 땄나 내기하곤 했던 기억들은 생각만 해도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오빠들은 스스로가 만든 썰매를 등에 지고 마을앞 논바닥 (개발 전엔 서울이라 하더라도 시골풍경이 많았습니다) 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썰매날이 가운데 하나뿐이어서 긴 꼬챙이로 일어서서 타는 썰매,(이 썰매는 오빠들만 탈 줄 알았죠)
-여러대의 썰매를 이어붙여 작은 오빠가 배를 깔고 그 썰매에 납작 엎드리면,우리 동생들이 모두 오빠의 등에 올라타고 앉아 여러개의 꼬챙이로 양 옆의 얼음을 밀며 나아가는 기차썰매,
-꼬챙이질을 잘 못하는 어린애들을 위한 끈달린 썰매.....
형제들중에서 네번째 였던 저는 미처 오빠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속상한 마음에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발을 동동 구르곤 했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오빠들이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썰매를 연못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썰매는 꺼내지 못한 채 개발 바람이 불던 어느해 연못이 매립되면서 같이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날이 두툼하고 매우 성능이 좋은 썰매였기에 오빠들의 원성은 그후로도 꽤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혔지요.
오빠들은 연도 잘 만들었습니다. 큰오빠는 그야말로 만능이어서 어디서 주워왔는지 대나무 쪼가리를 갈라 방패연이랑 가오리연을 만들어 뒷동산 제일루 높은 곳에 올라가 동네를 다 내려다보며 연을 날리곤 했습니다. 나도 한번 날리게 해주면 저녁에 내가 먹을 고구마를 오빠에게 주겠다고 약속하고 날려보다가 나뭇가지로 곤두박질 쳐놓는 바람에 다 망가뜨려 오빠에게 꿀밤께나 먹었지요
제가 10살쯤 되었던 어느 정월대보름날의 잔상이 떠오릅니다.
오빠들은 저녁에 '쥐불놀이'를 하겠다며 하루종일 빈 깡통에 못으로 여기저기 구명을 내고 있었습니다. 불이 잘 타오르도록 공기구멍을 만드는 것입니다. 작은오빠는 밭두렁으로 다니며 깡통 속에 넣을 나뭇가지를 줍기에 여념이 없었구요. 그 뒤를 쫒아다니며 나도 하나 만들어달라고 울며 보채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드디어 밤이 되어 대낮처럼 밝고도 맑은 달빛 아래로 오빠들이 달려 나가고 나면 언니와 나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빠져나갈 틈새만 노렸습니다. 기회가 오자 도망치듯 나와 논두렁에서 쥐불놀이 깡통을 열심히 돌리고 있는 오빠들을 찾느라 발이 논구덩이에 빠지는 것도 몰랐습니다. (엄마는 오빠들에겐 그렇게 후하시다가도 언니와 저에겐 엄하신 편이어서 ‘계집애가 밤중에 어딜 나가냐’시며 말도 못꺼내게 하셨지요.)
그 날 엄마몰래 나오면서 엄마가 가장 아끼시는 명주마후라(그땐 목도리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를 머리에 쓰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논두렁을 이리저리 쫒아다니며 불 놓은 것을 구경하고, 연기냄새를 맡으며 달빛아래 돌아다니느라고 매끌거리는 엄마의 명주(실크)마후라가 달아나는 것도 몰랐습니다. 집에 돌아와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어머니는 내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모진 목소리(?)로 '마후라를 찾기전엔 들어올 생각 마라'는 호된 벌을 내리셨습니다. 흥미진진했던 밤마실의 댓가치곤 어린 저에겐 너무도 혹독했지요. 그날 밤 2~3시간은 족히 되도록 언니와 저는 마후라를 찾아 달빛 찬 빈 들판을 헤매었었답니다. 결국 엄마가 가장 아끼시는 보물목록 제 1호였던 마후라는 찾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 머플러의 쑥색 페이즐리 무늬가 또렷이 기억날때면 모든것이 풍족지 않았던 시절이니만큼 꽤 속상하셨을 엄마의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입춘이 지나고 나면 학교가 개학하고 곧이어 봄방학이지요.
조금 날이 풀릴듯 하면 동네 애들과 골목으로 나가 고무줄을 하곤 했습니다. 그시절 제일 먼저 고무줄놀이용 노래에 등장하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꿈에서도 기억할수 있는 노래, 정말 많이 불렀던 그리운 노래입니다.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며는
땅에도 새~봄이 돌~아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네'
고무줄 놀이에선 언제나 제가 제일 오래 남는 아이였습니다. 절대로 걸리지 않았거든요.
고무줄을 잡고 있던 술래가 나중에는 화가 나서
"얘 , 그만 좀 해라, 나도 좀 하자. "
하고 부탁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
돌이켜보면 참으로 아름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넉넉잖은 월급봉투속에 우리 오형제의 모든 욕망이 다 들어있었으니 이룰 수 있는 소원보다는 그렇지 못한게 훨씬 더 많았던 시절이었지만, 지금이 그때보다 물질적으로 조금 더 풍족하다 하여 그 시절보다 더 아름답다고 결코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들어 부쩍 그시절이 그리워집니다.
TV 도 ‘;귀농’이나 ‘자연다큐멘터리’ ‘옛모습과 정취’관련 프로그램만 찾아 시청하게 되는 것이 아무래도 지난 시절에 대한 깊은 향수에 빠져들고 있는게 분명합니다.
몸은 추웠지만 마음만은 누구못지 않게 뜨거웠던 그 시절이 진정 그립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제가 가졌던 그 아름다운 추억들을 우리 자녀들에게는 충분히 물려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콘크리트 아파트 속에서 그냥 지나버린 아이들의 어린시절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또 모르지요. 애들은 나름대로 제 어린시절을 도시의 풍경 그대로 아름답게 기억속에 새겨놓고 있을런지...
날씨가 계속 풀리지 않는 요즘이지만 분명 봄은 멀지 않은듯 합니다.
구제역이다 조류독감이다 들려오는 소식마다 우울합니다. 그 시절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병명들이 난무하니 어찌된 일인지 모를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그 겨울이 그립네요.
추운 날씨도 곧 풀리겠지요. 우리의 얼어붙은 농가경제도 머지않아 봄눈 녹듯이 풀리리라 기대해 보면서 어떤 환경이든 우리의 마음과 영혼만은 늘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전례없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혹독한 계절을 견디며...
2011년 정월에 씀.
'글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걷는 즐거움 (1) | 2011.02.20 |
---|---|
주문진 겨울여행 (0) | 2011.02.03 |
홈스테이보고서 (0) | 2010.10.07 |
노년에 들어섬을 인정하며 살아가기 (0) | 2010.06.06 |
홈스테이를 했습니다. (0) | 2010.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