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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외삼촌

이제쯤은산촌에서 2011. 4. 21. 22:03

대전 외삼촌

우리형제들에겐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는 낱말이다.

외삼촌이 두분 더 계시지만 대전외삼촌은 우리 형제들에겐 좀 남다르시다. 엄마의 둘째 오라버니시면서 100세까지 장수하신 우리 외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셔온 홍씨집안의 효자이시기 때문만은 아니다.

천성이 온유하시고, 비록 시골에 사시지만 젊은 세대들과도 잘 통하실 만큼 사상이 고루하지 않은 외삼촌을 대할때마다 우린 늘 평온함을 느끼곤 했다.

평안도 신의주가 고향이신 부모님덕에 서울 외 지방에 마땅한 친인척 연고가 없던 우리가족이 유일하게 갈곳이 있었으니 바로 대전외삼촌댁이었다. 대전이라기보다는 유성온천부근이라고 해야 맞는 말일것이다.

어린시절, 해마다 여름방학이 되면 엄마는 우리 형제들을 여행삼아 대전외삼촌댁에 2,3일정도 보내시곤 하셨다.

요즘같으면야 방학이라고 여기저기 많이들 다니지만 그때만해도 여행이란 꿈도 못꿀 시절이었기에 그 짧은 여행은 어린 우리들에겐 귀하디 귀한 경험이었다.

영등포역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 기차를 타고 대전역까지 내려가는  동안 우리들은 마냥 즐거웠다. 기차안에서 사먹는 찐계란이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대전역까지는 무수한 정거장이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안양을 지나수원이며 천안역(이곳에선 호도과자 파는 아저씨가 승차해서 한바탕 목소리를 높이며 지나간다. 하지만 호도과자을 먹고싶은 것은 마음뿐 , 참아야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무심히 지나가는 아저씨를 바라만 보곤 했다)을 지나 신탄진 조치원역까지.......완행이었으니 말해 뭣하랴.

출발시의 기대감이 점차 지루함으로 바뀔즈음 드디어 

    '여기는 대전, 대전입니다~'

라는 특이한 뉘앙스의 역무원 안내소리가 확성기속으로 흘러나오면 우리는 다시금 들뜬 마음을 되살리며 기차를 내린다.

대전역에서 유성까지 다시 버스를 탔던것 같다. 버스를 내려서부터는 내 어릴 적 기억이 드디어 맑아진다.

버스터미널부터 외삼촌댁까지는 걸어서 족히 30분은 걸린다.

여름이었으므로 뙤약볕에 30여분을 걷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는 내내 우리가 도착하면 반가이 맞아주실 외삼촌의 모습을 상상하면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당시만 해도 개발바람이 아직 일지 않았던 때라 우리의 동심은 시골의 자연을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개울을 건너 논둑을 따라 한참  걷다보면 제법 그럴듯한 커다란 시멘트다리가 나오고 그 다리를  건너서부터는 개울 둑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한다. 왼쪽으로 보이는 개울은 넓고 커서 물이 많았고 오른쪽으로는 수양버들이 줄지어 길따라 늘어져 있었으므로 우리들의 가는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개울은 삼촌댁 싸립문을 지나서도 한참을 위쪽으로 계속되었기에  싸립문을 밀치고 들어서면서 우리의 여정은 끝이 난다.

초가집안으로 들어서서 제일먼저 근엄하신 외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면 옛날 훈장님이셨던 외할아버지는

"왔네(왔니)?"

하시는 말씀이 고작이셨다

외할머니와 외숙모님께도 인사를 드리고 나면 드디어 우리들의 시골에서의 첫날이 시작된다.

넓은 마당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돼지을 키우는 축사와 우물이있었고 왼편으로는 닭을 키우는 계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외삼촌댁에는 염소도 키우고 강아지도 있었는데 가축의 냄새가 나기도 했으련만 그런것은 전혀 괘념치 않고 어린 우리들의 맘에는 모든것이 그저 재미있고 신기하기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삼촌은 염소젖을 짜서 주셨는데 따뜻한 염소젖이 얼마나 고소하던지....

그리고 나서 우리는 닭장안으로 들어가 방금 낳은 알을 꺼내오라는 외삼촌의 명령(?)을 수행한다.

어린마음에 닭이 쪼는 것이 무서웠던 나는 가슴졸이며 어미닭을  쫒느라 애태우곤 했다. 닭의 둥지안에 하얗게 담겨있는 따스한 달걀을 손에 쥐는 그 감촉이란 말로 표한키 어려운 것이었다.

바로 집 뒷동산엔 과수원이 있었다. 외삼촌은 그곳에 참외며 수박이랑 도라지등을 가꾸시며 높다랗게 원두막을 세워놓으셨다.

원두막에 올라앉으면 앞 시냇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며 가슴이 확  트이는 것을 느낄수 있었고 밭에서 따온 과일들을 먹으며 누워 있으면 소로록 잠이 들기도 했다.

귀청을 때리는 매미며 쓰르라기 소리는 살갗을 스치는 솔솔바람과 더불어 우리를 한여름 낮잠에 달콤하게 빠져들게 했다.

과수원을 내려오는 말미에 소외양간이 있었다.

외양간 옆에 조그마한 방이 하나 딸린 흙담집도 있었는데 어느해 여름방학에 언니와 동생은 아랫채에서 잠을 자게 되었고  나는 그 방에서 혼자 잠을 자게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라 방에는 호롱불을 켜놓았다.

그날따라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몹시 치던 밤이었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밤새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뒤집어 쓴채로 바을 홀딱 새우고 말았다. 새벽에서야 겨우 잠이 든 나는 언제나 새벽 일찍 이슬을 밟으며 밭을 돌아보시고 가축들도 살피시는 외삼촌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아침늦게까지 늦잠을 자야했다.

외양간 옆이라 송아지 우는 소리에 잠을 깨 밖으로 나오니 비바람몰아치던 게 언제였냐는 듯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엊저녁내린비로 풀잎들에 맺힌 빗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상쾌하고 깨끗한 시골 언덕의 느낌이란!

과수원 한옆에 외삼촌이 심어놓으신 도라지 꽃은 하얀것도 있고  보라색인것도 있다. 무리지어 피어있는 도라지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금도 눈을 감고 그시절을 생각하면 광경이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몹시도 더운날 밤엔 삼촌은 멱감을 준비를 하고 우리들을 데리고 개울가로 나가신다.

"얘들아. 시냇가에 목욕하러 가자~~~"

물이 풍부하고 깨끗했던 개울엔 여기저기 밤목욕하러 나온 동네  사람들이 각자 물가에 자리하고 앉아, 어둠탓에 모습은 데간데 없으되 목소리들만 내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어이, 오늘 유성장에 나가셨다는데 돌아오셨남?'

'글쎄, 오셨겠지뭐."

하면서 말이다.

우리들은 외삼촌이 목욕하는 곳은 애써 피하여 얕으막한 곳에  자리하고 앉아 목욕이라기 보다는 물장구를 치며 여름밤을 즐기곤 하였다.

엄마는 우리들이 2,3일 이상 그곳에 머무는 걸 허락지 않으셨다.

외삼촌이랑 외숙모가 힘드시다면서 말이다.

누구에게라도 폐끼치는 건 절대 용납이 안되는 우리 엄마때문에  방학이라 시간도 많은데도 우린 서울로 올라와야만 했다.

외삼촌은 그저 아무말않고 가만히 계시기만 해도 마음에 푸근함을  느끼게 해주는 분이시다. 마음의 고향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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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외삼촌이 많이 편찮으시다.

늘 강건하실줄만 알았는데.....

그동안 사느라고 바빠 통 찾아뵙질 못했던게 편치않은 죄책감으로  마음에 남는다.

살아가면서 꼭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웃어른을 자주 찾아뵙는 것도 그중 하나라는 걸 깨닫는다

언제까지든지 우리곁에 남아 계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년전 외삼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외삼촌.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너무나 죄송해요."

하고 말씀드리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게 사는거지 뭐, 너나없이 다 마찬가지야.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고 사는거지 뭐."

삼촌이 빨리 쾌차하셔서 다시금 대전외삼촌댁에 여행갈 수 있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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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4. 27 외삼촌께서 소천하셨다. 하나님께서 외삼촌의 영혼을 기뻐받으셨을줄 믿는다..................